스마트폰, 화상통화, 1인 미디어 시대.
이 모든 세상을 무려 50년 전에 예술로 예언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백남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백남준을 “TV를 쌓아 올린 예술가” 정도로만 기억하지만, 알고 보면 백남준은 예술과 기술, 미래를 동시에 바꾼 혁명가였습니다.
오늘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삶과 예술을 차분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백남준 기본 프로필 한눈에 보기



이름 : 백남준
출생 : 1932년 7월 20일
사망 : 2006년 1월 29일
향년 : 73세
고향 : 경기도 경성부 서린정 (현 서울 종로구 서린동) 국
적 : 미국
배우자 : 구보타 시게코(1937~2015)
직업 : 비디오 아티스트, 작곡가, 전위 예술가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나 세계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입니다.
99칸 한옥에서 자란 소년, 백남준의 어린 시절
백남준은 종로 육의전 전통을 지닌 대부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백낙승은 직물·금융·제약을 아우르던 대기업가로, 당시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였습니다.
집에는 99칸 한옥, 피아노, 전축, 영사기까지 갖춰져 있었고, 국내에 몇 대 없던 캐딜락으로 통학할 정도였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에도 백남준은 문화적 결핍 없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과 철학, 예술의 뿌리를 만든 학업 과정
백남준은 경성수송국민학교와 경기중학교를 거치며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습니다.
특히 아놀드 쇤베르크의 음악을 접한 경험은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예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홍콩 로이든 고등학교, 일본 도쿄대학교 문학부 미학 전공, 독일 프라이부르크 국립음악대 수료, 뮌헨대학교에서 철학과 음악사학 박사 과정을 밟으며 백남준은 예술·음악·철학을 넘나드는 기반을 다졌습니다.
‘문화 테러리스트’라 불렸던 행위예술가



백남준 독일 유학 시절, 백남준은 존 케이지와 조지 마치우나스를 만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부수고, 몸의 움직임 자체를 작품으로 삼는 행위예술에 몰두합니다.
피아노를 도끼로 부수거나, 머리에 먹을 묻혀 캔버스 위를 굴러다니는 퍼포먼스는 당시 유럽 미술계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이로 인해 백남준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플럭서스 운동의 중심, 세계를 떠돌다
백남준은 플럭서스(Fluxus)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뉴욕과 유럽을 오갔습니다.
초기에는 기행으로 폄하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백남준은 퍼포먼스 예술의 개척자로 재평가받게 됩니다.
그가 추구한 예술은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TV를 예술로 바꾸다, 비디오아트의 탄생
백남준이 가장 혁신적인 이유는 세계 최초로 비디오아트라는 장르를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1960~70년대 TV는 ‘바보상자’로 불리던 시절이었지만, 백남준은 TV를 창작의 재료로 선택했습니다.
그는 일본 기술자들과 함께 영상 신디사이저를 직접 개발해 전자 신호를 조작했고, 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대표작으로 보는 백남준의 예술 세계








글로벌 그루브(1973)
세계 최초의 뮤직비디오 개념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TV 부처
불상이 TV 화면을 바라보는 설치 작품으로, 동양 사상과 첨단 기술의 충돌을 상징합니다.
다다익선
수백 대의 TV로 구성된 대형 설치 작품으로 백남준의 철학을 집약합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
세계 최초 인공위성 생중계 예술 프로젝트로, 전 세계 수천만 명이 동시에 시청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백남준은 기술이 인간을 감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소통의 매개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50년 앞서 미래를 예언한 백남준
1974년, 백남준은 ‘전자 초고속도로’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누구나 작은 화면을 들고 다니며 정보를 주고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 말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유튜브 시대를 정확히 예측한 발상이었습니다.
빌 게이츠보다 20년이나 앞선 예언이었기에, 백남준은 예술가이자 미래학자로도 평가받습니다.
백남준의 아내, 예술적 동반자 구보타 시게코
백남준의 부인은 일본 출신 비디오 아티스트 구보타 시게코입니다.
두 사람은 1960년대 퍼포먼스 현장에서 인연을 맺고 1977년 결혼했습니다.
구보타 시게코는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백남준의 창작 파트너였습니다.
특히 TV 부처 탄생 과정에는 그녀의 현실적인 조언과 헌신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자유로웠던 인간 백남준의 마지막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에도 백남준은 권위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을 만날 때도 일부러 흐트러진 차림으로 나타났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볼지 포기한 순간부터 진짜 자유로워졌다”고 말했습니다.
2006년, 백남준은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서는 조문객들이 서로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며 그를 추모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퍼포먼스로 남았습니다.
왜 지금도 백남준이 중요한가
백남준은 단순한 비디오아트 작가가 아닙니다.
그는 기술과 예술의 결합, 동양과 서양의 연결, 그리고 미래 사회의 모습을 가장 먼저 상상한 문화 혁명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디지털 세상 한가운데에는, 이미 반세기 전 이를 예견한 백남준의 상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묻습니다.
백남준, 그는 누구인가?
그 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